‘난 아직 죽지않았어’

매너좋고, 풍부한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지혜, 그러나 젊은 직원들에겐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웃기기도하고 짠하기도하고. 

몇년 전 로버트 드니로가 나왔던 영화 '인턴'을 본 느낌은 그렇다. 역동적인 벤처 기업의 분위기와 젊은 직원들, 그속에 산전수전 다겪은 70대의 백전노장이 자신만의 완벽함으로 상황마다 당당히 맞서려고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의 고군분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거나 불편함이 될 수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각오가 무색하게 그는 언제 잘려도 아무도 아쉬워하지않는 인턴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끝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영화의 결말보다 현실은 훨씬 더 차가울지 모른다. 

백전노장의 경험담은 진부하고, 진심어린 조언도 '꼰데의 잔소리'로 전제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치열한 경쟁의 시대를 뚫고 살아온 요즘 사람들에게 인생 선배를 보고 배우는 여유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설정이지만, 국내에선 이처럼 '올드 보이'들의 재취업이 가능할까.

국내 금융 IT분야로 얘기를 좀 좁혀보자. 국내 은행의 IT부서 20년의 근무 경력을 가진 50대(代) 중반의 A씨는 과연 IT회사에 재취업할 수 있을까.

물론 조건은 계약직이다. 만약 A씨가 취업에 성공한다면 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실제로 활발하지는 않지만 금융회사 IT퇴직자와 금융IT 전문인력을 구하는 IT기업을 매칭시켜주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 몇몇 존재한다.

퇴직자는 다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서 좋고, IT기업은 큰 부담없이 20~30년 노하우를 가진 금융 IT전문인력을 확보할 수 있어서 윈-윈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같은 잡 매칭이 이뤄지는 경우가 생각만큼 활발하지 않다. 설령 매칭이 된다고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이 분야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물론 여기 몇몇의 사례만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고 조심스럽다. 실제로 영화 '인턴'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게 IT기업에서 오히려 더 역동적인 활동을하는 금융권 은퇴자들도 있기때문이다.

<디지털데일리>도 지난 2015년부터 금융권 IT퇴직자와 IT기업간의 구인, 구직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나 기대만큼의 활발한 실적은 없었다. 지금부터 얘기하는 것은 금융회사 IT출신 퇴직자가 취업 매칭이 성공하지 못하는 그 몇가지 이유들을 사례로 든 것이다.

◆“내가 왕년에....” 퇴직해도 변하지 않는 '甲' DNA = 만약 IT기업으로 재취업을 결심했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이제부터 '을(乙)'의 마인드로 스스로 맹렬하게 변신해야한다는 것이다. 재취업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이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할 것 같은 이 얘기가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렵다는 게 IT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본인은 물론 스스로 변할 수 있다고 다짐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갑의 DNA가 안바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금융전문 솔루션 기업의 B대표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경우가 많았다.

이 DNA가 바뀌지 않으니 IT기업내 기존 직원들과 협업이 어느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갑의 DNA'는 왜 잘 안바뀌는 것일까. 

몇가지 이유가 꼽힌다. 직접 당사자들에게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판단하기에 “일단 갑에서 을로 치열하게 DNA까지 변신할만큼 스스로 절박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은행 IT부서 출신으로 IT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C 대표는 절박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은행에서 20~30년 정도 근무하다 퇴직하면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할 정도의 퇴직금은 받기때문에 사실 본인만 욕심부리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또한 50대 중반쯤에 은퇴하면 자녀들도 이미 대부분 장성한 경우가 많아 부담이 덜하다.” 

실제로 금융권 전체는 아니겠지만 은행원의 경우, 다른 산업군에 비해 결혼이 대체로 빠른 편이다. 은행원이면 저리 주택자금 대출 등의 혜택을 이용할 수 있어 비교적 다른 직군보다 일찍 신혼을 시작하는데 부담이 적고, 그 때문에 50대에 이르면 이미 자녀들에 대한 교육 부담이 끝난 경우가 많다.   

물론 '절박함'이란 감성을 수치화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는 정말로 재취업이 절실하고, 또 누구에게는 심심한 소일 거리일 수 있다. 다만 일할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그 공간이 지금보다는 더 크게 열렸으면한다. 

◆'금융IT' 전문성과 노하우?... IT업계에서도 “실제 기대치 과거만큼 높지 않아”= 그렇다면 이번에는 IT기업의 입장에서 금융권 IT퇴직자들에 대한 선호도는 어느 정도될까. 바꿔 말하면, ‘금융권 퇴직자가 가진 금융IT에 대한 노하우와 전문성을 어느정도 IT기업이 필요로 할까’ 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도 과거와는 몇가지 측면에서 크게 인식의 변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예전보다는 금융IT 퇴직자들에 대한 선호도와 기대치가 낮아졌다는 분석이다.

대표적인 이유로 최신 더욱 빨라진 IT기술의 진화를 꼽는다. IT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금융권 IT 퇴직자가 최신 IT기술에는 경험이 없고,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런한 선입견이 실제로 잡매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오히려 최근에는 금융회사 IT부서 출신보다는 은행의 일반 현업이나 준법, 규제부서 출신을 선호하는 IT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IT기업 입장에선, IT지식보다는 복잡한 금융 일반업무에 대한 이해, 업무 프로세스, 금융규제나 관련 법안 등에 대한 지식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기때문이라는 것. 

과거보다는 지금이 금융권 IT 퇴직자에 대한 니즈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진단이다. 

이제는 좀 오래된 얘기지만, 과거 금융권 IT부서장들은 퇴직하면 일반 IT 기업의 임원 등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C 대표는 “이들은 정말로 금융IT 부문에서 실무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직접 코딩을 배웠고, 업무 애플리케이션을 종합적으로 진행해 본 경험자들이라는 것.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국내 은행권에선 IT부서 직원들, 특히 책임자급들이 직접 코딩을 하는 경우가 없어졌으며, 대신 RM과 같은 관리자의 역할만하게 됐는데 이는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개인의 역량 하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됐다고 진단한다. 

차세대시스템 개발 프로젝트 이후, 외부 SI업체들에게 프로그램 개발 경험이 자연스럽게 넘겨지고 사실상 기획 기능만 남게됐다는 것인데, 결국은 이것이 금융 IT인력들에게는 경쟁력의 하락을 가져오는 부메랑이 됐다는 분석이다. 

물론 사람의 IT역량을 어느 기준에 맞출 것인지는 시대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 기업 채용에 있어 사람의 IT기술 수준만을 평가하는 것도 위험하다. 

다만, 최근 디지털금융 광풍이 불면서 은행 등 주요 금융업종에서 과거보다는 훨씬 진화된 개념의 IT인재 육성에 앞다퉈 나서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박기록 기자>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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