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2기를 맞는 시진핑(習近平)이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19기 1중전회를 통해 '1인 권력'기반을 강화함에 따라 그를 진나라의 시황제(秦始皇)와 직접 견주는 기사들도 눈에 띤다. 

특히 그동안 중국 최고권력교체기, 특히 '집권 2기' 출범과 동시에 불문율처럼 나타났던 '격대지정'(隔代指定, 차차기 지도자를 미리 낙점)을 유보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시진핑이 후계 그룹들간의 충성경쟁을 유도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견해도 있다. 격대지정이 장점보다는 오히려 차기 권력에 줄을 서는 이른바 미래 권력이 조기에 부패할 위험성이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진핑은 '2050년 세계 최강국'의 꿈, 즉 '중국몽'을 위협할 가장 큰 위험요소로 '권력과 사회의 부정 부패'를 꼽고 있다. 

시진핑의 본심이 어디에 있든, 또 시진핑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2300년전 중국의 절대 권력자인 시황제와 비교하는것은 중국 특유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지나쳐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진핑을 진시황과 견주게 된 근거는 '1인 권력의 강화' 부분 때문이다. 즉 부정적인 뉘앙스의 비교다.

그러나 진시황을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지른 역사적인 '폭군'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그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매우 걸림돌이 된다.  그의 악행을 감안하더라도 어쩌면 진시황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저평가됐거나 왜곡된 군주일지 모른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드물게 '과로사한 황제' =
  진시황 하면 '아방궁'을 떠올리지만 정작 그는 '주지육림'과 같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을 즐긴 여느 중국 황제와는 전혀 딴판인 인물이다. 

진시황의 이름은 정(政)이다.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호베이(호북)성 남서부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은 진시황의 고향이라고 볼수는 없다. 한단은 시황제의 아버지 자초가 볼모로 조나라에 잡혀와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진(秦)나라는 지금의 중국 서북지역인 산시성(陝西省)을 근거로 한다. 시진핑의 고향은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西安)과 가까운 푸핑(富平)이다. 이 지역은 원래부터 시 주석의 부친이며 혁명 8대 원로인 시중쉰(習仲勛)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굳이 시공을 초월해 따진다면, 시진핑과 진시황은 옛 진나라 영토를 근거지로 한 동향 사람이다.

정사에는 자초, 즉 장양왕(BC.281~BC.247)의 아들로 기록돼있지만 재상 여불위가 생부(生父)라는 것은 거의 정설이다. 

막대한 재력가였던 여불위가 자신의 첩을, 볼모로 보내져 타국 생활을 하던 장양왕에게 상납했던 과거 때문이다. 실제로 여불위는 13세에 왕위에 오른 진시황의 집권기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중부(仲父)'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어쩌면 시황제가 여색을 밝히지 않은 이유중 하나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컴플렉스,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이 작용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진시황은 요즘 말로 표현하면 지독한 '워크 홀릭'이었다. 매일 몸소 대량의 문서를 처리했으며, 정해 놓은 수량에 미치지 못하면 쉬지도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만해도 종이가 없고 '죽간'으로 읽던 시대다.

그는 중국을 첫 통일한 뒤, 모두 5차례의 지방순시를 강행했다. 진나라의 수도는 중국의 서북 지역인 '함양'이다. 지금처럼 비행기나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지방순시는 몇개월씩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오늘의 중국을 있게한 개혁, 개방의 선구자 덩샤오핑이 1980년대초 권력을 잡은 뒤 상하이, 선전 지역 등을 시찰한 것을 '남순강화(南巡講話)'라고 부르는데, 개인적으론 진시황의 지방순시와 이 장면이 오버랩된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개혁, 개방을 성공시킨 덩샤오핑을 꼽는다. 

 

'인민이 잘살 수 있다면 자본주의도 받아들이겠다'던 덩샤오핑은 남순강화를 통해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특구를 설치,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과감한 해외 자본을 유치했고, 이후 20년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끈다.

그러나 진시황은 다섯번째 지방순시도중 병을 얻었고, 사구(沙丘)에서 숨을 거둔다. 재위 37년만이다. 

진시황은 숨을 거두기 직전, 변방을 지키던 맏아들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황제를 이어받으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환관 조고가 조서의 내용을 바꿔 오히려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령하고 능력치가 떨어지는 호해를 새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가장 강력한 국가로 평가받았던 진, 오늘날까지 차이나(China)로 불렸던 진나라는 이후 도처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멸망한다. 진나라가 중국의 통일국가로서 존재했던 것은 불과 15년(B.C. 221~B.C. 207)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진시황의 업적 =
2300년전, 고대시대의 절대권력자에게 민주적 사고 방식과 소통의 덕목까지 요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외의 업적은 시대를 초월해 매우 혁신적이다.특히 단기간에 이처럼 난해한 일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그가 정말로 '워크 홀릭'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토지제도와 법령의 재정비는 예나 지금이나 충분하고 논리적인 근거와 치밀한 로드맵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곧바로 밑천이 드러나게 된다. 개혁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오고, 결국은 정권의 안위도 위태로워진다. 

진시황은 기존 진나라 고유의 법령을 기초로 하되 나머지 병탄한 6개국의 법률도 일부를 흡수했다. 모든 법령은 혼선과 해석의 여지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주기적으로 관리했다. 

중국 대륙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함으로써 해당 지역 출신이 그 지역에 관리로 부임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군현제는 시대에 따라 다소 변형되기는 했으나 중국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까지 2000년이 넘는 행정, 경제의 골격을 형성했다.     

이어 화폐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문자의 통일은 그 속성상 매우 디테일하고 소프트한 드라이브가 필요한 개혁이다. 

화폐의 통일, 즉 요즘으로치면 '화폐개혁'이다. 통일 국가는 당연히 통일 화폐를 써야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누르고 새로운 통일된 화폐를 유통시키기위해서는 강력한 법과 규제 못지않게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결돼야 가능한 일이다. 자칫 화폐개혁에 실패하게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되고, 경제는 순식간에 혼돈에 빠질 수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크게 갈리기는하지만 여전히 진시황은 '폭군', 만리장성을 쌓고 불로장생을 꿈꿨던 '권력욕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비록 15년만에 멸망했지만 진시황의 진나라는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통일 국가의 기틀이 다져진 경제와 각종 통일된 법령과 제도를 갖추기위해 노력한 '국가다운 국가'였다. 

물론 진나라는 멸망했지만 뒤어어 그 유산을 이어받은 한나라는 한무제때 실크로드 개척을 비롯해 역사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시진핑의 집권 2기로 들어서는 현재의 중국은 2300년전 진시황때와는 다르지만 유사한 부분도 많다. 강력한 군사력과 세계 2위의 경제력에 힘입어 미국과 함께 '빅2' 반열에 올라, 이제는 '세계 최강'을 지향한다.

중국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 현재 중국을 위협하는 것은 '부정부패'다. 역대로 중국을 통일한 왕조의 존속기간은 200여년이 채 안된다. 결과적이지만 중국은 국가의 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내부의 부패와 권력 쟁투로 스스로 몰락하는 과정을 여러번 반복해왔다.

몇십년이 지난 시점에서 되돌아 본다면, 어쩌면 지금이 중국의 최전성기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성 때문인지 몰라도 시진핑의 2기 집권 정책의 방향성도 지난 1기때와 마찬가지로 '부패 척결'이라는 기본 골격에서 크게 벗어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공을 초월한 '중국몽', 어쩌면 '모래성'일지도= "왕후장사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진나라 말기 반란을 일으켰던 진승이 한 말이다. 

진승은 호해가 진시황의 뒤를 이어 이세황제로 오른 원년에 BC 209년 노역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하지만 폭우를 만나 정해진 기한까지 목적지에 인부들을 데리고 도착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해지자 참수형을 당하느니 나라를 뒤집어 보자고 동료 오광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킨다.

몰론 이들의 반란은 이후, 유방, 항우와 같은 토벌군에게 제압되지만 결과적으로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된다. 

전문가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이 직면하게 될 여러가지 리스크(위험요소)를 경고하고 있다.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양극화, 불평등지수의 상승, 분출되는 민주주의 욕구에 대한 과도한 제압, 배타적 중화주의와 주변국과의 갈등 등이 위험요소로 꼽힌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는 시공을 초월해 '중국의 꿈'(중국몽)을 외치지만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역설적으로 중국을 진정한 번영으로 이끌었던 것은 소프트한 혁신, 예를들면 당, 송 시절처럼 '문치(文治)'에 성공했을 때이다. 

진시황은 당시 흉노와 국경을 접했던 지역에 만리장성을 쌓기시작했지만 정작 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 오히려 당시 흉노에게 적절한 원조를 해주면서 화친정책을 펼쳤을때가 가장 평화롭고 번영된 시기였다. 중국의 4대 미녀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왕소군이 한나라(전한)때 흉노의 왕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다.

중국의 왕조는 전통적으로 힘이 강성했을때, 위세를 떨치기위해 주변국을 대상으로 대규모 정벌을 일으켰지만 대부분 그 후유증으로 몰락을 재촉하고 만다. 

어쩌면 중국의 최고 권력자에게 '강성한 국가의 힘'은 결과적으로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중국몽'이 '모래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박기록 기자>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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